'또 다른 즐거움 찾기/재미난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23.08.04 예전 유럽의 양치질 방법
  2. 2023.06.08 케찹의 탄생 이야기
  3. 2019.07.19 젓가락의 역사
  4. 2019.07.18 돼지 저금통
  5. 2019.07.08 콜롬버스
  6. 2019.07.02 늑대의 후예-개
  7. 2019.06.21 고대 왕의 사체처리-미라를 만드는 방법
  8. 2019.06.18 고대인들은 어떻게 치아를 관리했을까?-칫솔
posted by 늘 기쁜콩 2023. 8. 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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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질은 우리 인간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습관이며, 이는 고대부터 계속해서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며 수행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전 유럽 지역에서는 현대의 칫솔과 치약과 같은 습관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방식으로 양치 진행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로마 제국 시대: 소금과 꿀 사용

  • 로마 제국 시대에는 소금과 꿀을 사용하여 양치를 시행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 소금과 꿀을 혼합하여 사용하는 방법으로, 크게 매우 깔끔한 방법은 아니었으나 일단은 예전 유럽에서 사용되던 양치 방법 중 가장 일반적인 방법 이었으며 빈도가 높았습니다.
  •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치아 표면을 그리 멋대로 상하게하고, 치아 충치를 유발하는데 크고 작은 모미들이 있는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2. 중세 시대: 식칼(또는 쇠칼) 사용

  • 중세 시대에는 식칼(또는 쇠칼)을 이용한 양치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 양치 효과는 있으나 도구를 사용한 만큼 최소한의 경험이나 스킬을 필요로 했습니다.
  •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화려한 수제 식칼은 절대로 합리적인 옵션은 아니었지만, 그 때 흔한 간단한 선조의 도구 중 하나였습니다.

3. 짚실 사용

  • 짚실이라는 도구는 혼합 연화물로 재활용됐던 짚을 양치하는데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 짚을 마구 씹으면서 치아를 깨끗하게하는 방식입니다.
  • 이 방법은 효과적인 클린징을 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도구 없이도 가능한 효과적인 해결 방법입니다.

4. 선원의 경우: 잉크 사용

  • 예전 유럽에서는 선원이나 화물선의 크루들은 의외로 긁어내는 방법이나 짚실 등 예전 유럽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일반적인 도구를 이용해서 양치를 보수했다고 합니다.
  • 또한 잉크를 이용해서 양치 진행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 잉크의 구성 성분중 하나인 가루 / 황산(산화제파생물) 등의 성분이 치아 표면에선 적어도 일부 오염물질을 제거함으로서 명확한 양치 효과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전 유럽에서는 칫솔과 같은 현대적인 양치질 도구가 없기 때문에, 다소 특이하게 양치를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많은 양치 기구들이 개발되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중요한 것은 칫솔이나 치약 등의 현대적 양치 기구를 사용하여 양치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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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늘 기쁜콩 2023. 6. 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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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케찹의 탄생

케찹은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소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탄생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고대 중국, 481년의 언자료가 가장 초기의 케찹에 대한 기록입니다. 당시에는 "향스러운えん」으로 불렸습니다. 다른 문서도 동일한 기록을 담고 있었지만, 17세기 전국성회에서 도입한 "케찹"이란 이름이 처음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이름도, 레시피도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케찹은 17세기, 동남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초코레오와 비슷한 소스로 발디비스라고 불렸습니다. 발디비스는 고사리의 씨앗, 된밀, 된대추, 된홍합, 된새우, 등을 함께 조리하며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소스는 비대칭 알레르기의 원인이 된 대문에 인기가 없어습니다. 이후 중국에서는 달콤하게 매운 맛의 쿠술라(口水辣), 스위트칠리 소스 등의 레시피를 만들어가며 발전해나갔습니다.

 

2. 유럽으로 전파된 케찹

 

케찹이 유럽으로 전해질 때부터는 완전히 다른 얼굴로 변합니다. 18세기 유럽의 모든 인조자원건축은 오리올룰홈에서 생산된 케찹에 의존했습니다. 이 케찹 속에는 포도나무나 설탕 같은 자연재료 외에 아마도 아스페어 등의 화학추출물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이때부터 케찹이 대중화되기 시작합니다. 1807년 처음 유럽으로 수입되어 로렌츠라는 유명한 과일가게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배, 사과, 바나나, 자색토마토 등의 다양한 첨가재료 혹은 조미료와 함께 다양한 레시피가 개발되었습니다.

 

3.  현재 케찹의 인기

 

현재 케찹은 우리 동네 마트든 대형마트든 어디든지 볼 수 있는 재료입니다. 케찹은 버거, 핫도그, 프렌치프라이, 피자 등의 패스트푸드 메뉴에 대한 대표적인 소스. 그리고, 케찹의 매운맛이나 달콤한 맛을 다양하게 바꿀 수 있는 포화된 향기로 인해, 각종 요리에 사용되는 소스로 깊이가 더해지게 됩니다.

 

특히, 케찹에 함유된 바이오소분자 진핵산류에서 발생하는 좋은 효과는, 체중 감량, 콜레스테롤 개선, 설탕 대사 개선 등 면역력을 강하는 데 최적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케찹은 지금도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소스 중 하나이며, 대중적으로 좋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렇게 케찹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전세계적인 대중적인 소스로 발전해왔습니다. 케찹의 유래와 역사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아가고, 음식의 무궁무진한 변화에 동참할 수 있는 재미와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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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늘 기쁜콩 2019. 7. 19.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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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본 현지에서 먹힐까 미국편을 보니 젓가락 사용이 우리처럼은 아니더라도 사용법을 알거나 낯설어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젓가락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젓가락은 서양의 포크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 지금은 서양식의 요리를 먹을 때 칼을 쓰지만 옛날에는 칼이 그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도구로만 여겨졌다.
따라서 그때는 칼은 식탁에 올리지 않았다.
옛날 서양 사람들은 칼과 포크를 쓰는 대신,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동양에서 젓가락을 쓰기 시작한 것이 지금부터 4천년 전쯤인데, 그 배경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실용적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젓가락을 쓰면 손에 음식을 묻히지 않고도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젓가락은 약 4천년 전에 중국에서 가장 처음으로 쓰였다. 그때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 손을 이용하여 음식을 먹고 있었다. 칼은 음식을 준비하는 도구로만 쓰고, 포크는 발명되기 전이었다. 기원전1 세기 밀가루가 확산되면서 중국에서 국수와 만두가 유행하고, 젓가락이 최적의 식사 도구로 자리 잡는다.

조선시대의 민속화를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의 식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가의 남자들은 젓가락을 사용하고, 숟가락으로 식사를 하고 여러가지 반찬을 먹는다.
반가의 여자들은 숟가락만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사실 동양의 음식들은 부엌에서 먹기 좋게 잘라져서 식탁에 오르기 때문에 먹으면서 다시 자를 필요가 없다. 예전엔 돈이 많은 사람은 상아나 은으로 만든 젓가락을 썼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나무나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썻다. 
지금은 젓가락을 써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약15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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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늘 기쁜콩 2019. 7. 18.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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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저금통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옛날 사람들은 '피그(pygg)'라는 흙으로 만든 그릇에 돈을 넣어 두고, 이 그릇을 '피그 뱅크(pygg banks)'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미술가가 이 그릇의 이름을 잘못 알아듣고는 돼지 모양의 붉은 도자기를 만들었다. 

중세 영국 사람들은 값싼 점토로 도자기를 만들어, 그 안에 쓰고 남은 돈을 넣어 두었다. 중세 사람들은 돈을 은행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항아리나 접시에 놓아두었다. 이 단지를 만들 때는 '피그(pygg)'라는 이름의 점토를 썼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넣어 두는 그릇을 '피그 뱅크(pygg bank)' 또는 '피기 뱅크 (piggy bank)'라고 불렀다.

1800년대의 어느 날, 영국의 한 미술가가 '피그 뱅크'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피그(pygg)'라는 점토가 거의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미술가는 그 점토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오해를 한 미술가는 작은 돼지 모양의 도자기를 주문자에게 만들어 주었다. 돼지 도자기 등에 동전을 넣을 수 있는 틈을 뚫자, 이 돼지 모양의 저금통은 아이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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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늘 기쁜콩 2019. 7. 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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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버스하면 여행이 떠오를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많은 여행을 했다.
그는 에스파냐 바리돌리드의 한 수도원에서 1506년 5월 20일에 죽었다.
그후 1513년에 그의 며느리의 요청에 따라 국왕 명령으로 세비야 인근의 산타 마리아 데 라스 쿠에바스 성당으로 이장했다. 그녀는 1537년 다시 콜럼버스의 시신을 신대륙의 산토드밍고 섬에 이장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 역시 국왕이 허락했다. 그리하여 콜럼버스의 시신은 대서양을 넘어 산토도밍고 성당에 묻혔다. 그러나 여기서도 잠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옮겨다녀야 했다. 옮기고 옮기고를 계속하다가 결국 1899년 그의 유해는 거의 400년 만에 세비야로 귀환했다. 그리고 1902년에 이 위대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 세비야 성당에 대형 조형물을 건조했다. 작은 관에 넣은 그의 유해가 이 멋진 조형물 밑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이전 1877년 산토도밍고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 이곳 성당에서 일하던 사람이 납으로 된 상를 발견했고, 그 안에 13개의 큰 뼈와 28개의 작은 뼈가 들어 있고, 겉에는 '저명한 위인 크리스토발 콜론'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도미니카 공화국 당국은 이것이 진짜 콜럼버스의 유해라고 주장했다. 과연 어느 곳에 있는 유해가 진짜 콜럼버스일까?  

에스파냐와 도미니카 공화국은 모두 자국의 것이 진짜 콜럼버스 유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는 동안 한편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는 가설은 최최초에 묻혔던 바야돌리드 수도원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다른 시신을 넘겨주고 진짜 콜럼버스 시신은 그대로 두었으리라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수백년 동안 사람들은 엉뚱한 사람의 시신을 이리저리 옮기며 콜럼스라고 믿었던 셈이다. 제일 처음에 콜럼버스의 시신이 묻혔던 수도원은 이제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으니, 더더 이상 실상은 확인할 길이 없어 이것도 하나의 미스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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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늘 기쁜콩 2019. 7. 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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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 '반려동물'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개가 떠오르는데 이러한 개가 정말 늑대의 후예일까?

늑대와 너무나 닮은 개의 모습이나 특징들이 있어 너무나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정말 가능한 이야기일지 많은 학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오랜기간 연구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 니스 지방의 라자레 동굴의 입구에는 특이하게 늑대 머리뼈가 놓여 있다.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의 주거지에서 의도적으로 갖다 놓은 머리뼈가 발견되었다. 조사에 따르면 이 뼈는 고기를 뜯고 남은 뼈가 아니라 동굴에 사람들과 함께 살던 늑대의 뼈로 밝혀졌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석기 무렵 인간은 지금 우리가 개를 기르듯이 늑대를 길렀다는 뜻이될 것이다.

- 가축화의 특징

야생동물이 가죽화가 되면 나타나는 몸짐이 작아진다. 사람과 함께 생활하려면 몸이 크면 서로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교배등으로 가죽이 적당한 크기가 되도록 통제하여 점차 같이 살기에 적당한 표준적인 크기로 안정화된다.

몸집 뿐만 아니라 행동 양식도 완전히 바뀌어 다 자라도 유년기적인 특징을 가지게 된다. 사람에게 계속적인 돌봄을 받으며 보호를 받아 더욱 인간, 주인을 의지하는데서 머물게 된다.

개의 경우는 더 발달한 면을 보여주는데 인간의 감정을 포착하고 거기에 반응하는데 있다. 인간의 웃음을 모방해 안면 근육을 당겨서 웃는 흉내까지 내는 개를 사람들은 기꺼이 '인간의 친구'라고 부르며 가까이 둔다.

 

- 늑대의 특징

늑대의 여러가지 특징들이 애완동물인 개로 변화하기에 적당하다.

1. 늑대는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 늑대에게 복종을 잘한다. 이러한 성격 덕분에 늑대는 주인인 인간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2. 늑의 사회는 모계사회로 일부일처제이다. 평생 한마리의 수컷과 암컷이 짝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살아간다. 이는 인간사회와 아주 닮아있다.

3. 늑대 사회는 인간 사회와 흡사하게 사회적 서열이 엄격하게 존재한다.

4. 늑대는 다른 동물에 비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몸짓이나 음성신호가 풍부하다.

 

- 개의 특징

1. 시각

개도 색상을 구분할 수 있다. 인간에 비유하면 적녹 색맹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의 눈에는 원세포가 적어서 색상 분별력이 떨어지지만, 대신 간상세포가 많아서 어두운 곳에서 물체의 윤곽은 쉽게 구분된다. 인간은 텔레비젼을 보면 자연스러운 동영상으로 인식하지만 개는 정지된 영상이 빠르게 깜박이는 것으로 인식이 된다.

 

2. 청각

개는 인간의 청각보다 훨씬 뛰어나고, 귀를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세워서 보다 집중하여 들을 수 있다. 개의 겉귕는 17개의 근육이 있어서 귀의 방향과 모양을 조정한다.

 

3. 후각

개가 냄새를 맡을 때는 평소 숨을 쉴때와는 달리 킁킁거린다. 콧구멍을 통해 들어온 공기를 가두어서 보다 냄새를 잘 맡기 위한 행동이다. 개는 한 번 맡았던 냄새를 기억하여 냄새를 식별한다. 개가 냄새를 기억하는 매커니즘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4. 미각

개는 짠맛, 단맛, 신맛, 쓴맛을 모두 느끼지만 사람의 미각세포가 9천개인 것에 반해 개는 1천7백여개로 다른 감각에 비해서 둔한 편이다. 고기 맛과 단 맛을 가장 잘 느끼며 짠맛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데, 개가 주로 섭취하는 고기에 염분이 충분하므로 염분을 따로 보충할 필요가 없어 짠맛을 느끼는 수용기가 적다.

- 개의 진화와 역사

유전자 연구에 따르면 개는 늑대로부터 약 10만 년 전 이전에 분리된 것으로 추측되며, 2013년 개의 화석을 이용한 분석에서는 33,000~36,000년 전 사이에 분화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개가 인간에 길들여진 시기는 약 1만 5천년 전 이후 또는 1만 4천년~1만 2천년 전으로 추정되며, 최소한 9천년 전에는 가축으로 기르고 있었다.

인간이 개를 기른 것을 증명하는 유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이라크의 팔레가우라 동굴에서 발견된 개 뼈이다.

 

늑대에서 개로, 번견.수렵견.조렵견.목축견.경비견에서 애완견으로, 이제는 반려견으로 우리의 100년, 1000년을 함께할 개는 앞으로도 우리인간과 함께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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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늘 기쁜콩 2019. 6. 21.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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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군에 참가했다가 튀니지에서 사망한 성왕 루이(루이 9세, 1214`70, 가톨릭 성인으로 시성됐다) 국왕의 사체를 프랑스로 가져와야했다. 그러나 날씨가 더워 부패가 쉽게 일어날것이므로 포도주 속에 사체를 끓여 살을 발라내고 뼈만 추려가지고 온 적이 있다.

위의 예처럼 왕의 사체를 미라로 만드는 방부 처리 기술은 고대의 여러 기록들에 남아있다. 
우선 국왕이 서거하면 혹시나 다시 살아 돌아올지 모르므로 24시간의 시간을 기다린후에 여러가지 검사를 시작하고 주요 장기들의 상태를 관찰한 후 기록으로 남겼다. 

기록이 정리되면 그 후 본격적으로 미라를 만들기 시작한다. 몸의 부패하기 쉬운 기관들을 제거하였다. 그 때에는 사체에서 나는 냄새는 잘못 맡으면 즉사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믿었기때문에 각종 방향제를 사용해서 정향, 장미수, 레몬, 오렌지, 안식향 등의 물질이 함유된 방향성 포도주로 사체를 씻은 다음, 면으로 입.눈.코.귀를 막고 왁스 입힌 천으로 쌌다. 

왕의 장례식은 장례 기간이 장기간 거행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오랫동안 부패를 지체시켜야 했다(샤를 9세의 장례식은 매장할때까지 한달 반이나 걸렸다고 한다)

한편 적출한 내장들은 하다못해 수술 중 사용한 스펀지 등은 모두 수거하여 통에 넣어 관 옆에 함께 두었다. 이때에 중요 기관인 심장만 따로 방부처리를 하였다.  반쯤 미라가 된 국왕의 사체는 납으로 만든 관에 넣어 프랑스 왕실 성당인 생 드니 성당에 안치했다. 

프랑스 역대 국왕들의 묘지 생 드니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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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늘 기쁜콩 2019. 6. 18.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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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솔

기원전 35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 이쑤시개라 말하기에는 좀 큰 나뭇가지를 사용했다. BC 3000년경에 이집트에서 쓰였던 좀 더 발전된 형태의 도구가 발굴되었는데 나뭇가지를 이빨로 깨물어 부드러운 섬유질로 쪼개놓은 모양이었다. 이쓰시개와 칫솔의 중간 정도 형태라고나 할까?

비슷한 도구는 기원전 1600년 중국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중국의 것은 좀 더 실용적이었는데 나뭇가지의 한쪽 끝은 이집트의 것처럼 씹어서 이빨을 문지르는 데 사용할 수 있고 반대편은 날카롭게 깎아 이쑤시개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다기능 도구였다.

미국 치과 협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칫솔은 1498년 중국의 황제가 사용한 칫솔이었다. 동물 뼈에 돼지털을 박아서 만든 이 도구는 현대적 칫솔과는 조금 질적인 차이가 있을망정 구조에 있어서는 거의 일치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1223년 송나라에 유학했던 일본 승려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인들이 소의 뼈나 대나무에 말의 꼬리털을 끼워 이를 닦았다고 말한 기록이 있는 걸을 보면 실제로는 역사가 더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돼지털이든 말꼬리든 털 하나하나를 일일이 심어서 만들어야 하는 칫솔의 가격은 만만하지 않았다. 황제를 포함한 소수의 귀족 외에는 구식 이쑤시개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칫솔이 유럽의 귀족들에게도 도입이 되었는데 그들은 뻣뻣한 돼지털이 잇몸에 상처를 낸다고 싫어하며 사용하기를 꺼리고 대신 거위의 깃털을 이쑤시개로 사용했다.

1789년에야 영국의 윌리엄 애디스가 야생곰이나 말의 털을 이용한 칫솔을 만들어냈고 그의 후손이 19세기부터 대량생산하기 시작해 광범위하게 퍼졌다. 물론 그것도 동물의 털을 이용한 것이기에 값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1937년 미국의 화학회사 듀폰du Pont에서 나일론 섬유를 이용한 칫솔을 개발한 후에 소수 부유층의 전유물을 벗어나 대중의 물건이 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사물의 민낯/김지룡/애플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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