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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말하는 삶

마리 앙투아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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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해받은 사람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꼽을 수 있을것같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에서 태어나고 자라 세상 물정을 몰랐고,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달리 천성이 밝고 공부를 싫어하며 즐기기를 좋아했던 탓에 궁정 정치에 미숙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민들로부터 왜 자신이 미움받는지,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몰랐다.

왕의 부인인 동시에 정치가여야 하는 왕비가 되기에 적합하지 못한 성격과 성미였다.

그것은 남편인 루이 16세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이 그들 부부의 불행의 원인이자, 프랑스 혁명의 초기 향방을 결정짓는 주요 요소이기도 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왕조국가의 국민은 제 나라의 왕을 탓하지 못한다.  왕과 가장 가까이 있는 외국인 왕비는 마녀가 되기에 최적이었다.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                  <장미를 든 마리 앙투아네트>, 1783년, 캔버스에 유채, 113X87cm, 베르사유궁, 프랑스 역사박물관

"빵 대신 케이크를 먹어라"라는 말을 했다는 것은 헛소문일 뿐이며, 오히려 감자를 수입해 널리 보급하여 기근을 줄였다.

수많은 애인을 두고 난잡하고 추잡한 사생활을 한다는 둥, 너무 사치스러워 왕가 재산을 탕진했다며 '적자 부인'으로

불리는 등 온갖 음해와 음모에 시달렸다.

확실한 근거는 없었으나, 대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그것을 믿었다.

그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숙적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에서 시집온 탓이 크다.

어제는 적국의 공주였으나, 오늘은 왕비가 된 그에게 프랑스 국민은 애정보다는 미움을 보였고,

그것을 애정으로 바꾸기에 그의 역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윌리엄 해밀턴, <1793년 10월16일 처형장으로 떠나는 마리 앙투아네트>,1794년, 캔버스에 유치, 152X197cm, 비지유 성, 프랑스혁명 박물관

<단두대로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비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있다.

베르사유 궁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 필의 말이 끄는 사다리 마차(양쪽에 사다리가 달린 싸구려 마차)를 타고 시민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으며 혁명 광장의 단두대로 향했다.

루이 16세에게 예를 갖췄던 것과 달리, 왕비를 실은 마차는 많은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천천히 움직였다.

구경거리로 전락한 왕비가 시민들의 조롱과 야유를 견디는 방법은 눈을 감거나 무표정하 정면을 보는 것뿐이었다.

두 팔을 결박당한 채로 허리를 곧게 편 왕비는 초라한 면직 모자로 짧게 잘린 머리카락을 감춘 여느 사형수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날카로운 콧대와 굳게 다문 입에서 수모를 견디려는 안간힘과 명예를 지키려는 위험이 남아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재판에서 단두대에 이르는 데까지는 3일 걸렸다.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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