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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말하는 삶

미켈란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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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자화상

바티칸시티 내의 성시스티나 성당의 거대한 천장화 '천지창조'. 그리고 같은 성당의 거대한 벽화 '최후의 심판'은 한 사람의 작품이다.

미켈란젤로. 천재들이 넘쳐났던 르네상스 시대에서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더불어 압도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미켈란젤로, 그에 대해 알아보자

미켈란젤로는 공부로써 가문을 일으키기를 원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미술에서 두각을 나타냈기에 당시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였던 기를란다요의 문하에 들어간다. 그때가 미켈란젤로의 나이 13세였다. 그러나 그 스승은 미켈란젤로를 키워낼수가 없다. 그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재능이 너무 넘쳤기 때문이다.

 

'회화는 조각의 밑이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평생 갖고 있었던 생각이다.

메디치 가문이 세운 학교에서 조각수업을 받게 된 것이 14세. 이때 이미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은 피렌체의 부호 로렌초 메디치의 눈에 띄였고, 로렌초는 그런 미켈란젤로를 아낌없이 후원했다. 메디치가라는 훌륭한 환경 속에서 미켈란젤로의 기초는 탄탄하게 구축되었다. 

 

미켈란제로의 '피에타'

 

세계적인 걸작 '피에타'와 '다비드상'은 20대 중반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24세에 만든 피에타 하나만으로도 미켈란제로는 대가의 반열에 오른다. 피에타에서 예수의 시체를 안고 있는 마리아는 어깨띠를 두르고 있는데 거기엔 미켈란젤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통틀어 유일하게 자신의 작품임을 나타낸 표시이다. 

 

조각가이면서 화가, 건축가, 시인이었던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못지않은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다. 해부학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그래서 천재의 대명사인 다빈치보다 미켈란젤로를 더 뛰어난 천재로 보는 연구가들도 많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괴팍하였고 외모는 못생겼다고 한다.

게다가 작업 중에 묻은 물감과 먼지에 개의치 않고 돌아다니기도 해 지저분하기까지 했다.

(당시에는 그런 모습으로 외부에 나가는 것을 예의에 크게 벗어난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또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 교황에게 대들기도 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독설을 내뱉었기에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과는 모조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브라만테, 도낱나텔로 등이 미켈란젤로와 곱지 않은 말들을 주고받은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이런 성격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자신도 어릴적 아버지의 괴팍함과 폭력에 시달렸고 한 동생은 돈만 아는 건달로서 평생 미켈란젤로를 성가시게 한 것으로 보아 그의 비사교적인 성격은 가족의 영향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작가적인 고집으로 나타나게 된다. 작품에 있어서만은 교황에게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황에 대한 저항은 당시로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행동이었지만 다행히 교황이 그의 재능을 높이 샀던 까닭에 무사할 수 있었다.

성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중 '천지창조'
성시스티나 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는 평생 일에 묻혀 살며 결혼도 하지 않았고 성가신 가족을 먹여 살렸으며

한시도 성하지 못했던 몸으로 90년을 살았다(1475~1564). 앞이 보이지 않는 몸으로 죽는 날까지 작품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가 숨을 거두었을 때 수많은 시만들이 애도했고 장례 또한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이제야 조각을 조금 알 것 같은데........." .

노벨상을 수수상했던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로롤랑랑은 천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함하면 미미켈란젤로를 보라고 했다.

 

참고문헌 : 휴식을 위한 지식/허진모/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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