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롭게 작은 뗏목에 20여명의 사람들이 얼기설기 올라 망망대해의 거친 파도 속에서 표류 중인 그림 <메두사호의 뗏목>을 그린 '테오도르 제리코' 화가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작품 <메두사호의 뗏목>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1. 테오도르 제리코
저명한 프랑스 화가이자 석판화가였던 테오도르 제리코는 1791년부터 1824년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종종 논란이 되는 주제의 극적이고 강력한 작품으로 유명했습니다. 테오도르는 프랑스 예술의 낭만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예술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랑스 루앙에서 1791년에 태어난 테오도르는 드로잉과 페인팅에 일찍부터 재능을 나타냈습니다. 1808년 파리로 건너가 신고전주의 화가 피에르-나르시스 게랭 밑에서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예술적 비전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와 낭만주의의 부상으로 특징지어지는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분위기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테오도르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난파선의 여파와 생존자들의 투쟁을 묘사한 거대한 그림인 "메두사의 뗏목"(1818-1819)입니다. 이 그림은 전시되었을 때 원시적 사실주의, 감정적 강렬함, 사회적 비판으로 인해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림의 세부 사항에 대한 테오도르의 세심한 관심과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포착하는 능력은 지속적인 영향에 기여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심리학에 대한 테오도르의 관심은 그의 초상화 시리즈와 정신 질환에 대한 연구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한 가지 주목할만한 작품의 예는 "미친 여자"(1822)로 구속복을 입은 불안한 여성을 묘사합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테오도르는 인간 존재의 어두운 측면을 탐구하고 사회적 규범 대해 도전했습니다.
그림 외에도 테오도르는 뛰어난 석판화가이기도 했습니다. . 그는 "Riderless Horses"(1820-1823)로 알려진 일련의 석판화를 제작하여 움직임과 에너지를 전달하는 그의 기술과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비극적으로 테오도르는 1822년 가슴 통증을 호소하고 있던 중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던 말을 타다 낙마했고, 사고로 인한 합병증으로 병세가 악화돼 젊은 나이인 32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사망하면서 그의 경력이 단절되었습니다. 너무나 짧은 삶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술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후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테오도르의 대담하고 감성적인 스타일은 19세기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발전을 위한 선구적인 길을 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기술적 탁월함, 심리적 깊이, 인간의 고통에 대한 탐구로 계속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2.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작품을 살펴보면 망망대해의 파도속에서 표류중인 뗏목 위 여러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침 저 멀리 구조선을 발견했는지 있는 힙을 다해 소리치며 옷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이 위 쪽에 보입니다. 이미 오랜시간 표류하고 있어서인지 자포자기로 포기한 사람들의 표정도 보입니다. 겁에 질려서 머리를 안고 절망에 쌓여 앉아 있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난 후인지 정신을 놓고 넋이 나가 뒤돌아 앉아 있는 이.....또한 그림 아랫부분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이들도 보입니다. 테오도르는 어떻게 이 그림을 그리게 된껄까? 궁금해 집니다.
(1) 메두사호
프랑스 왕실이 1816년에 세네갈을 재정비한다는 명목으로 메두사호를 필두로 여러 척의 배로 원정대를 꾸리게 되는데 그림 속의 뗏목을 이 '메두사호'의 조작입니다. 나폴레옹 통치 때부터 메두사호를 타던 선원들은 베테랑들이었지만, 그 배의 선장은 20년 넘게 항해하지 않았던 쇼마레였습니다. 그는 왕실에 잘 보이고 싶어 과욕을 부렸고, 빨리 도착하겠다며 무리한 항해로 결국 배를 좌초시킵니다.
이후의 상황은 더욱 끔찍하게 흐릅니다. 능력없는 이 선장은 대포를 버리지 않겠다고 버텨 결국 배가 가라앉아 어쩔 수 없을 때에야 배를 버리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배에 탑승한 인원은 400여명이었고, 구명보트에는 250여 명만이 탈수 있었습니다. 나머니 150여 명이 급한데로 뗏목을 만들어 구명보트에 묶어서 이동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구명보트와 뗏목의 연결 밧줄을 끊어버리고, 결국 선장과 귀족들은 구명보트로 탈출하게 된 후 150여명의 선원만 망망대해 속에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첫날부터 공포로 인해 20여 명이 자살하거나 파도에 떠내려갔습니다. 공포로 인해 폭동이 일어나고 서로 죽여서 60여 명이 사라졌고, 배고픔으로 인육을 먹는 참상이 벌어집니다.
지옥이 되어 버린 표류하는 뗏목에서의 보름째날, 멀리 지나가는 배를 발견하여 소리치지만 그 배는 이들을 못보고 지나칩니다. 그러나 지나갔던 배가 몇 시간 후에 다시 기적적으로 돌아와 뗏목을 발견했지만 목숨이 붙어 있던 이들은 겨우 15명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육지에 도착한 후에도 참혹하기만 했던 경험의 후유증으로 5명이 사망하고 맙니다.
무능력한 선장의 과욕이 너무나 많은 사람을 사망케 했지만 왕당파는 그 일을 그냥 묻어버리려했습니다. 하지만 생존자 중 리더 역할을 했던 외과 의사 앙리 사비니가 정부에 한 증언을 어느 신문사에 유출되면서 알려지게 됩니다. 프랑스 사회가 뒤흔들렸던 사건이었지만 체포된 선장은 고작 3년 형을 받는데 그쳤습니다.
(2) 메두사호를 그린 테오도르
1817년 11월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마치고 온 26세의 청년 화가 테오도르는 메두사호의 사건을 접한 후 그 사건을 그리기로 합니다. 그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많은 준비를 합니다. 생존자의 보고서를 작성후 당시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듣고 조사하고 그림의 색채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보종 병원 건너편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매일 병원 연안실을 반문하여 작품에 그려 넣을 시체를 좀 더 사실적으로 그리려 애씁니다. 그는 연안실에 앉아 스케치를 하다 급기야는 의사를 설득하여 사체의 일부를 본인 작업실로 옮겨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바다에서 표류하는 느낌을 경험하려 노르망디 바다로 찾아가 폭풍을 관찰하고 바다 풍경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또 메두사호의 뗏목을 축소하여 제가하고 당시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 노력합니다. 그는 그림 구성을 위해서만 1년이 넘게 고민하고 수많은 스케치를 그립니다. 준비와 제작 기간만 총 1년 6개월이 걸리고, 무려 가로 7m, 세로 4m나 되는 대작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1819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됩니다.
정부에서 숨기고 싶어한 사건이기에 작품 이름을 <난파 장면>이라고 고쳐 전시 했지만, 누구나 메두사호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젊은 화가의 천재성을 본 이들은 작품에 커다란 호감을 표현하였지만, 고전주의 작품을 선호하는 이들은 아름다움은 찾아 볼 수 없고 시체 더미를 그린 그림에 혐오감을 드러냈습니다.
살롱전에서 최고상인 금메달을 받게 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불편한 그림이었기에 국가 소장품으로는 성정되지 못하고, 구매자도 찾지 못해 테오도르는 파리 친구 집에 작품을 맡긴 후 조용한 시골로 가게 됩니다.
테오도르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사실적 표현, 대담한 구도, 강렬한 명암 대비, 거칠고 격렬한 붓 터치 등으로 젊은 화가의 천재성을 담아냅니다. 이 걸작은 이후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등 근대의 모든 예술 사조와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미술이 말하는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두아르 마네의 "피리 부는 사나이" (0) | 2023.06.08 |
---|---|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전쟁과 저항의 상징 (1) | 2023.06.06 |
고대 이집트의 비밀 밝히기: 로제타 스톤의 신비한 이야기 (0) | 2023.05.29 |
밀밭 너머로 말없이 가버린 고흐의 미스테리한 죽음-까마귀 나는 밀밭 (0) | 2023.05.28 |
파이프를 문 남자 (0) | 2023.05.03 |